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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 이야기

[맨땅에 양조장-02] 궁금한 건 못참지

일본 사업을 시작한 곳은 후쿠오카였다.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거리이고, 공항하고 시내가 가까워 도착하고 3-40분이면 사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출국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 제외한다면 파주 집에서 서초동 사무실까지 출근하는 시간보다 적게 걸리는 셈이다. 

 

후쿠오카는 일본 남쪽 규슈섬의 중심 도시이다. 북쪽에 있는 도쿄나 오사카와 달리 니혼슈보다 소주를 더 많이 찾는다. 아마도 더운 날씨 탓이겠지. 

 

여기서 하나 정리하고 넘어가자. 

 

우리가 ‘사케’라고 부르는 술은 사실은 ‘니혼슈’라는 술이다. 사케(酒)라는 단어는 일본어로 술이라는 뜻이다. 사케에는 니혼슈도 있고 맥주도 있고 소주도 있다. 일본 사람이 ’뭐 마실래요?’라고 물어볼 때 ‘사케요.’라고 대답한다면 십중팔구 ‘그래서 어떤 거 마시고 싶어요?’라고 되물어 볼 거다. 

 

니혼슈(日本酒)는 주로 쌀을 발효하여 만든 술이다. 발효된 술을 짜내어 맑게 가라앉힌 술을 니혼슈라고 부른다. 왜 니혼슈라고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들이 많지만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아무튼 쌀을 발효시켜 맑게 거른 술을 니혼슈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주세법에서는 청주에 해당한다. 도쿄 쪽에서는 니혼슈를 주로 마시니 사케=니혼슈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버린 듯하다. 

 

2007년 일본 사업을 시작한 이후 매달 2번씩 꼬박꼬박 후쿠오카로 출장을 다녔다. 도쿄 사무실을 오픈한 2010년 이후에는 도쿄와 후쿠오카를 번갈아 방문했다. 주로 1박2일 일정이었던지라 첫날 저녁은 현지 직원들과의 회식이 준비되어 있었고, 다양한 술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후로 출장을 다녀 올 때면 거의 매번 면세점에서 일본 소주를 한 병씩 사들고 왔다.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으면 들고나갔다. 다들 ‘소주가 이런 맛도 있구나.’하며 감탄을 한다. 물론 가지고 간 술이 떨어지면 도로 초록병 소주를 부어라 마셔라 했지만. 

 

일본의 이자카야에서 25도 짜리 증류소주 750ml 한 병에 2-3천 엔을 받는다. 면세점에서는 같은 용량, 같은 브랜드의 술이지만 38-40도 정도로 도수를 올린 술을 2-3천 엔에 판매한다.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다. 지금이야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증류소주를 마시려면 이보다는 훨씬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왜 그럴까? 

 

출장이 이어지면서 궁금증이 커져갔다. 한국에서는 희석식 소주가 대부분인데 일본은 왜 증류식 소주가 대세인 것일까? 다양한 소주와 니혼슈가 발전한 기반은 무엇일까? 우리가 마시는 술은 뻔했다. 맥주는 하이트 아니면 카스, 몇 가지 더 있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두 회사에서 가지치기로 나온 제품일 뿐이다. 소주 역시 다르지 않다. 진로 아니면 롯데에서 만든 소주가 대부분이다. 지역별로 지역 소주 업체가 있기는 하지만 주정을 공급받아 희석해서 만드는 건 마찬가지. 

 

일본을 겪으면 겪을수록 한국과 일본이 같으면서도 다른 나라라지만 술을 즐기는 문화의 차이는 훨씬 컸다. 이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출장 중에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에서 술에 관한 책을 찾았다. 일본 답게 많은 종류의 술에 관한 책이 있었고 주된 관심사였더 소주에 관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의 술에 대해서도 시간 나는 대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림이 잡히기 시작했다. 조선과 일본에서의 술이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어떠한 방식으로 한국의 술을 파괴했는지, 이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과 일본은 어떻게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지, 약주와 청주는 왜 주세법에 따로 구분이 되어 있는 것인지, 희석식 소주 표기는 왜 사라져 버렸는지…

 

거의 매일 마시는 초록병 소주에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모순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아픔, 군부 독재 시절의 억압, 고된 노동의 고통 등. 언젠가는 이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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