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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 이야기

[맨땅에 양조장-01] 오래된 시작

86년 2월, 대학 입시 마지막 관문인 면접시험이 있는 날이다. 시간 맞춰 학교에 도착했고, 정문 앞에는 온갖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요란한 피켓을 들고 응원을 나와 있었다. 설마 했지만 우리 학교 푯말도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찾아가 인사를 했다. 선배들이 건네준 따끈한 커피 한 잔이 그리도 고마울 수가. 

 

“면접 끝나면 지하철 역 앞에 중국집 있거든, 그리로 와. 신입생 환영회가 있으니 말이지.”

 

처음으로 술에 취했던 날이다. 아무 생각없이 주는 대로, 권하는 대로 받아 마셨던 나는 인사불성이 되어 선배에게 업혀 겨우 집에 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술꾼이 되었다. 

 

술꾼이라고는 해도 몸이 받쳐주질 않으니 많이 마실 수는 없었다. 술보다는 모여서 떠들고 이야기 듣는 것이 좋았다. 대학 시절에는 암울했던 현실에 대한 그다지 쓸모없고 생산적이지 않은 우울 때문에, 직장 다니면서는 재미없는 직장 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주잔을 기울이고 맥주잔을 비워 나갔다. 


2005년 3월, 전시회를 보러 도쿄를 찾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신주쿠역 뒷골목. 일행과 저녁을 함께 먹고 술도 얼근해졌지만 딱 한 잔이 부족했다. 같은 방을 배정받은 룸메이트에게는 적당히 둘러대고 혼자 방을 나섰다. 토요일 저녁의 신주쿠 뒷골목은 시끌벅적했다. 누가 일본인들이 조용하다고 그랬던가. 우리 명동 골목과 다름이 없었다. 거리 구경을 좀 하다 분위기 있어 보이는 2층의 술집으로 올라갔다. 그다지 넓지 않은 어둑한 가게에는 술꾼들이 테이블 반 정도 채우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메뉴를 가지고 온 점원에게 영어가 되냐고 물었지만 역시나 고개만 절래절래. 일본어라고는 인사말조차 제대로 모르던 시절이니 그냥 메뉴를 받아서 볼 밖에. 짐작대로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술집인 듯했다. A4 용지 한 장에 적혀 있는 메뉴는 알아먹을 수 없는 일본어로 가득했으니. 그나마 다행히 生(생)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여기가 생맥주인 모양이군.’ 몇 개 모여 있는 아이템 중 하나를 골랐다. 다음은 안주거리를 고를 차례. 생맥주가 왼쪽 위에 있었으니 오른쪽 아래는 안주거리거니 싶었다. 점원을 불러 대각선에 위치한 두 가지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주문했다. 점원은 두세 번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뒤돌아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을 받았던 점원은 생맥주 한 잔을 내려 놓고는 이내 맥주잔 한 잔을 더 내려놓는다. 이게 뭐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는 내게 점원은 뭐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O.K?”주문한 게 틀림없다는 확신의 미소와 함께. 

 

맥주는 시원하니 괜찮았다. 조심스레 따라온 맥주잔에 입을 댔다. 들척지근한 사케였다. 그나마 다행히 마실만했다. 멀건히 가게를 둘러보며 맥주와 사케를 몇 모금에 번갈아 마셔가며 서둘러 잔을 비웠다. 뭔가를 추가로 주문할 자신이 없어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가게를 나섰다. 편의점에서 캔맥주 두어 개와 안주거리를 사들고 호텔방으로 돌아갔다. 


2007년 5월, 후쿠오카 하카타역 뒷골목. 일본에서 이제 막 시작한 비즈니스 때문에 출장을 왔다. 현지에서 채용한 교포 직원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이자카야를 찾았다. 점원이 가져온 메뉴판에는 술과 음료뿐이었다.

 

“일본에서는 마실 것을 먼저 주문해요. 보통은 생맥주를 시킨답니다. 한 잔 하면서 목을 축이고 나서 본격적으로 먹을 것을 주문하지요.” 

 

2년 전 신주쿠에서 내가 저질렀던 바보짓이 바로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말 안 통하는 점원이 가져왔던 건 마실 것들만 잔뜩 적혀 있던 메뉴였던 것.

 

일본 사업을 준비하면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던 터라 메뉴판은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맥주, 니혼슈, 소주, 칵테일 등 다양한 마실 것들이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기재되어 있었다. 메뉴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니 소주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쌀, 보리, 고구마 등등 재료별로 서너 가지의 소주가 메뉴판에 적혀 있더라니. 그리고 그 각각의 술들이 다 다른 맛이라니. 내가 술에 관심을 갖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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