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술 이야기

희석식 소주는 어디로 갔을까?


“일요일은 내가 요리사~” 한 때 중국집 사장님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공포의 제품, 짜파게티. 재료를 볶고, 면을 삶고, 볶은 재료에 춘장을 넣고 다시 볶는 번거로운 절차를 라면 끓이듯 간단하게 만들어 준 혁신적인 제품이었습니다. 1984년 3월에 출시되어 35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이젠 짜장면과는 엄연히 다른 제품으로 독자적인 위상을 갖게 되었죠. 아직 짜장라면 때문에 문 닫았다는 중국집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다행입니다.


우리가 거의 매일 마시고 있는 초록병 소주는 소주계의 짜장라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된 소주를 마시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나마 소주 비슷하게 만들어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만들기 힘들고 귀한 술이었던 소주 초록병 소주는 소주 비슷한 술?


제대로 된 소주 한 잔이 나오려면 어떤 일들이 필요한지 잠깐 살펴보고 가볼까요. 우선 쌀을 깨끗하게 씻고 물에 불려 둡니다. 불린 쌀에서 물이 어느 정도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가루를 내거나 쪄서 고두밥을 만들고 물과 누룩을 넣어 잘 섞어 줍니다. 그리고는 항아리에 담아 술이 익기를 기다렸다 고운 채로 걸러내어 물을 타서 마시면 막걸리가 되지요. 물을 타지 않고 솥에 붓고 소주고리를 얹어 증류를 하게 되면 소주가 됩니다.


손도 많이 가고, 들어가는 재료에 비해 만들어지는 양도 많지 않습니다. 항아리 가득 술을 담아도 증류해서 내리면 몇 주전자 안 나오거든요. 조선시대에는 양반들만 마실 수 있던 귀한 술이었던 데에는 이런 까닭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를 살펴보더라도 증류주는 발효주보다 훨씬 비쌉니다.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 맥주를 증류한 위스키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죠.


소주는 증류주라는데 우리가 마시는 초록병 소주는 왜 부담 없는 가격일까요? 답은 소주가 아니거나 증류주가 아니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요. 어쩌면 짜파게티가 짜장면이냐 라면이냐와 비슷한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초록병 소주는 희석식 소주라고 분류했었습니다. 쌀이나 고구마, 타피오카 같은 전분질 원료를 발효한 후 여러 번의 증류 과정을 거쳐 주정이라고 부르는 90% 이상의 순도 높은 알코올(에탄올)을 만듭니다. 여기에 물을 타서 20% 정도로 알코올 농도를 맞춘 게 초록병 소주입니다.
초록병 소주의 라벨을 보면 물과 주정 이외에도 아스파탐이나 스테비오사이드, 설탕 같은 감미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재료가 무엇이든 90% 정도로 증류를 하게 되면 원래의 맛은 거의 남지 않습니다. 여기에 물을 탄들 알코올의 쓴 맛밖에 나지 않지요. 그러니 감미료를 넣어 원래 소주의 맛과 비슷하게 만들어 냅니다. 짜장라면과 비슷하죠?

 

제주도 국세청주류면허지원센터

대부분의 주정회사들은 타피오카 같은 전분질이 풍부하면서 저렴한 원료를 사용합니다. 원재료의 맛이 남지 않는데 굳이 쌀과 같은 비싼 재료를 사용할 이유가 없겠죠? 자동화된 공장에서 대규모로 생산하다 보니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소주를 마실 수 있게 된 겁니다.

 

다시 한번 소주병을 돌려 라벨을 살펴보시지요. 앞에서 ‘희석식 소주’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라벨에는 그냥 ‘소주’라고 표시되어 있을 겁니다. 2013년 이전에는 주세법에 따라 ‘희석식 소주’와 ‘증류 식 소주’로 달리 표기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2013년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세율이 같은데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소주’라 는 표기로 단일화되었습니다. 한데 두 가지 소주의 세율이 같아진 건 2000년 주세법 개정 이후였습니다. 13년 동안 ‘같은 세율’이었는데 구분을 해 왔던 걸 굳이 없앤 이유라고 하기엔 좀 옹색한 구석이 있습니다.

 

1965년 박정희 정부 시절, 식량 부족으로 쌀로 술을 만드는 것을 전면 금지한 이후, 1995년 이 조치가 풀릴 때까지 증류식 소주는 안동소주나 문배주 같은 전통적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만 명맥을 이어 왔습니다. 비싸고 특유의 탄내나 강한 향 때문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기는 힘들었지요. 2005년 현대적인 방식으로 만든 ‘화요’가 출시되면서 증류식 소주에 대한 인식이 차츰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출시된 ‘일품진로’는 증류식 소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고요.

 

시나브로 증류식 소주가 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희석 식 소주를 생산해 오던 대기업 입장에서는 돈줄인 초록병 소주가 굳이 ‘희석식’으로 분류되고 ‘증류식’보다 싸구려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을 듯합니다. 주세의 90% 이상을 납부하고 있는 큰 손으로서의 입김도 만만치 않았을 거고요.


희석식? 증류식? 맛을 음미하며 즐길 수 있는 좋은 술을 찾으려면


아무튼 어떤 이유던 간에 희석식 소주라는 이름은 슬그머니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이 이름을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듯하네요. 이제 더 이상 라벨을 보고 희석식과 증류식 소주를 구분할 방법은 없습니다. 게다가 초록병 소주 중에는 첨가물로 ‘증류원액’ 이 표기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니 더더욱 헷갈립니다.


일단 증류식 소주는 짜장라면과 짜장면의 차이만큼이나 가격이 ‘쎕니다’. 초록병 소주와 같은 용량의 25도짜리 증류식 소주는 대형마트에서 12,000~15,000원 사이에 판매됩니다. 도수가 높으면 가격도 올라갑니다. 라벨을 자세히 살피면 증류 원액과 정제수 이외의 첨가물이 없습니다. 이 정도 정보면 희석식 소주와 증류식 소주는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값도 비싸고 편의점에서 구하기 힘든 증류식 소주를 왜 찾아 마셔야 하나 싶으신가요? 짜파게티 먹었다고 중국집 가서 짜장면 안 드십니까? 혀끝을 잠시 맴돌다 사라지는 상큼한 향기와 입안 가 득 퍼지는 깊고 부드러운 술의 맛은 희석식 소주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소주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맛을 즐길 수 있는 좋은 술입니다. 진짜 소주라면 말입니다. 이제 고려와 조선을 이어 내려온 우리 소주의 세계로 새로운 여행을 떠나 보시지요.

 

(디어교하 여름호에 투고한 원고입니다.)